욕? 들을 용기
오늘 제가 부끄러운 고백을 교계의 공론장에 내어놓는 이유는 교회를 비난하기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한국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이다.그러기에 감히 말씀드리고 싶다. 우리는 무엇을 얼마나
많이 했는가보다 어떻게 섬겼는가를 먼저 돌아보아야 한다.
혹시 우리는 어려운 이웃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우리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평가하지는않았는지,
도움을 받는 이들의 처지보다 우리의 만족과 성취를 앞세우지는 않았는지 성찰해야 한다.
나눔이 전도의 수단이 되고, 봉사가 교회 성장의 전략이 되는 순간 복음은 힘을 잃게 된다.
현장에서 가장 가슴 아픈 질문은 이런 것이다. "연탄을 지원했는데 몇 명이나 교회에 나왔습니까?"
"봉사를 했는데 전도 성과는 얼마나 있었습니까?" "교회 성장은 어느 정도 되었습니까?"
그 질문 속에는 복음의 신비와 하나님의 은혜를 숫자로 계산하고 계량화하려는 우리 시대의
자본주의적 습관이 은연중에 숨어 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참된 사랑은 결코 계산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병든 자를 고치실 때도,
굶주린 자를 먹이실 때도 아무 조건을 달지 않으셨다. 주님은 그들이 장차 당신을 따를 것인가
아닌가를 계산하지 않으시고, 오직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먼저 사랑하셨고 먼저 품으셨다.
그리고 그 이후의 온전한 변화와 열매는전능하신 하나님의 주권적 몫으로 남겨두셨다.
제가 오랫동안 현장에서 느낀 것은 봉사와 나눔은 교회 성장의 목표가 아니라 결과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진심 어린 섬김이 쌓이다 보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교회를 신뢰하게 된다.
하지만 처음부터 교회 성장과 전도를 목표로 삼고 봉사에 접근하면 어느 순간 사람보다 성과가
중요해지고, 섬김보다 결과가 중요해진다.
특히 안타까운 것은 현장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교회의 시각으로만 봉사를 바라보는
경우다. 실제로 봉사 현장에 교회나 교회 관련 기관이 오면 함께 땀 흘리기보다 왜 이렇게
진행하느냐, 왜 이 사람을 먼저 돕느냐, 왜 이런 방식으로 지원하느냐는 쪽으로만 치우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물론 더 좋은 방향을 위한 의견은 필요하다. 그러나 현장에는 현장의 사정이 있고,대부분의
사회복지사와 실무자들은 대상자 한 사람 한 사람을 검토하고 고민하며 지원을 결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장을 이해하기보다 먼저 판단하려는 모습은봉사의 의미를 퇴색시키기도
한다. 우리는 때때로 섬기러 간 사람이 아니라 평가하러 간 사람처럼 행동할 때가 있다.
그것은 복음의 자세가 아니다.
현장에서 만난 가난한 이웃들은 우리의 동정이나 시혜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엄한 존재이며, 우리와 같은 눈물과 꿈을 가진 이웃이다.
우리는 그들을 도와주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어야 한다.
또 하나의 아쉬움은 강단과 현장의 거리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의 강단에서는 성탄절이나
명절, 혹은 사회적 재난이 닥칠 때마다 '강도 만난 이웃의 참된 이웃이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가 뜨겁게 선포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러한 외침들이 주일 강단의 거룩한수사학으로만 머물 뿐, 세상의
아픔을 실제적으로 치유할 지속 가능한 구조나 구체적인 사회나눔 프로그램으로 연결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오늘도 '욕 들을 용기'로 말한다. 한국교회가 지금보다 조금 더 낮아졌으면 좋겠다.
교단과 교회의 사회봉사부서들이 이웃과 사회를 향한 관심의 폭을 더욱 넓히고, 일회성이 아닌
지속적인 섬김을 이어 갔으면 좋겠다. 강단의 언어보다 현장의 언어를 배우고, 가르치기보다
먼저 듣고, 앞서기보다 곁에 머물렀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어려운 이웃을 전도의 대상으로 보기 전에 섬김의 대상으로 바라보았으면 좋겠다.
복음은 결과 이전에 과정이며, 사랑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님의 마음
이기 때문이다. 진심 어린 나눔과 섬김은 인쇄되지 않은 하늘나라의 전도지와 같다. 누군가의
삶 속에 남겨진 사랑의 흔적은 어떤 전도지보다 오래 기억된다.
봉사 현장에 온전히 녹아들어 거룩한 땀방울을 흘릴 때 교회는 성장의 도구가 아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공동체로 다시서게 될 것이다. 세상이 교회를 향해 손가락질하는 시대
일수록 교회는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야 한다.
한국교회는 공허한 말씀만 선포하는 강단에서 내려와, 마치 원주교 쌍다리 아래 집 없는
사람들이 노숙하고 한때 파지 수거하던 재활대원들이 잠을 자던 가장 낮은 삶의 자리를
복음의 출발 선으로 삼아야 한다.
가장 낮은 곳에서 흘린 사랑의 땀방울이야말로 세상이 읽는 살아 있는 복음이기 때문이다.
섬김이 허기복
2026.7.3. 한국기독공보사 ‘현장칼럼’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