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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부일보] 밥상공동체·연탄은행 대표 허기복 목사 ˝모두와 함께 이생명 나눕시다˝
  • 게시판 작성일 아이콘2013.08.21
  • 게시판 조회수 아이콘조회수 828
밥상공동체·연탄은행 대표 허기복 목사
"모두와 함께 이 생명 나눕시다"
중부일보 2013.02.20
소년은 가난을 입고 다녔다. 1억원이라고 쓴 가짜 돈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위안을 받았을 정도로 소년과 가족들은 돈이 없었다. 농사를 짓던 아버지가 노름에 한 눈을 팔았던 게 화근이었다. 대신 어머니가 하숙을 쳤지만, 살림살이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소년은 그런 부모를 위해 밥이라도 적게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허기진 소년, 연탄 나누는 목사 되다

밥상공동체·연탄은행 대표인 허기복(57) 목사의 어릴 적 별명은 ‘허기진’이었다. 늘 주린 배를 움켜지고 다닌다고 해서 생긴 별명이었다. 국물로 양을 늘린 음식으로 끼니를 때웠고 거리에 떨어진 음식을 주워 먹기도 했다.

20대가 되어서도 가난은 그를 따라다녔다. 인적이 드문 밤길을 걸을 때면 구두를 벗어, 들고 다닌 적이 잦았다. 차비를 아끼려면 발품을 많이 팔 수 밖에 없었던 그에게 그것은 삶의 지혜에 속했다. 60~70년대 허 목사의 고향인 부천 오정리에서 가난은 일상적이었지만, 그와 가족들은 유난히 그 세례를 깊게 받았다.

가난은 지금의 허 목사를 있게 해준 원동력이다. 어머니가 신앙으로 가난을 견뎌내는 모습을 보면서 그는 목회자의 길을 걷겠노라고 다짐했다. 신학대 재학 시절 ‘밥상공동체’라는 단체를 구상하며, 평생 가난한 사람을 돕고 살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배경도 결국 가난에 대한 실존적 깨달음 때문이었다.

▶‘가난이 나를 나답게 하는 교과서’

목사 안수를 받은 지 5년째 되던 1994년, 그는 강원도 원주의 허름한 교회로 내려갔다. 목사 사례비도 줄 형편이 안 되는 어려운 교회였다. 서울에서 안정적으로 목사 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결단을 내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IMF 경제위기가 닥쳤다. 거리에는 직업을 잃은 사람과 노숙자들로 넘쳐났다. 그는 생활 정보지와 유선방송을 통해 자원봉사자를 모집하고 ‘1천원 모으기’ 캠페인을 벌였다. 그 돈으로 원주 쌍다리 밑에서 무료급식을 했다. 이것이 ‘밥상공동체’의 시작이었다.

밥상공동체는 이후 취업상담, 주거지원, 아동·노인 돌보기 등으로 복지사업의 발을 넓혀갔다. 그러던 중 허 목사는 추운 겨울 냉방에서 연탄 한 장 없이 지내는 한 할머니의 사정을 전해 들었다.

“한국이 OECD에 가입했던 직후인 2002년께였습니다. 국민소득 2만달러를 바라보던 그 시절에 한 장에 250원 하던 연탄이 없어 냉방에서 누워계신 한 할머니를 보게 됐죠. 당시 복지사업을 여러 개 진행하고 있었는데, 연탄까지 나눠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습니다. 한 독지가가 연탄을 대겠다고 나선 게 계기가 돼, ‘연탄은행’을 설립했죠.”

‘은행’이라고 이름 붙인 데에도 이유가 있었다. 은행에는 나눌 돈이 얼마든지 있다는 생각에, 연탄은행에 연탄을 저축하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길 바라는 소망을 담았다.

그해 원주에 1호점을 세운 이후 연탄은행은 전국으로 뻗어나갔다. 현재는 서울과 부산, 인천, 대구, 대전, 전주 등 31개 지역에 33호점까지 설립됐다. 그만큼 남을 돕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시민들이 많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그간 나눈 연탄 개수만 7억6천만여개. 매년 국내에서만 4만명의 자원 봉사자가 참여하고 있다.

허 목사는 연탄은행을 찾는 많은 봉사자들을 대하면서 희망을 읽는다. 연탄은행 홈페이지에 뜨는 작은 공고를 보고, 나눔을 실천하겠다고 찾아오는 수많은 사람들을 통해 우리 사회가 여전히 살만한 곳임을 확인하고 있다. 아마 그들도 자신처럼 ‘얼굴은 까매질지 모를지언정, 마음은 하얘지는 기쁨’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연탄은 사람을 닮았다

연탄은행은 여름철에는 전국 16개 시도를 대상으로 연탄 사용 가구를 조사한다. 연탄을 필요로 하는 곳에 제때에 연탄을 전해주기 위해서다. 벌써 10만 가구의 DB를 구축해 놨다. 정부도 갖고 있지 못한 자료다. 지난 2011년에는 중앙아시아의 키르키즈스탄에도 연탄은행을 설립했다. 그곳에서 생산되는 연간 10만장의 연탄이 그곳 국민들을 위해 사랑의 불꽃을 피우고 있다.

허 목사는 연탄을 사람과 인생에 비유했다. “무연탄에서 압축돼 검은 연탄이 되는 과정은 성장기를, 불꽃처럼 타오르는 것은 청춘의 열정과 닮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하얗게 태워 길바닥에 뿌려지죠. 연탄 한 장에 인생의 흐름이 담겨 있습니다. 또 연탄은 홀로는 타지 못합니다. 적어도 두 장은 필요하죠. 밑의 연탄이 타올라야 윗연탄도 불이 붙게 됩니다.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과 너무도 비슷하지 않습니까.”

연탄불을 피워 자살하는 사건이 늘어나는 요즘, 허 목사는 연탄을 자살 도구로 이용하는 세태에 대해 짙은 아쉬움을 표했다. 연탄으로 생명을 이어가는 사람들 앞에서 연탄불로 생명을 끊어서는 안된다는 얘기다.

“연탄 1장의 무게 3.6㎏입니다. 신생아 몸무게도 평균 3.5㎏ 정도죠. 어려운 이웃들에게는 연탄 한장이 갓난아기의 생명처럼 소중합니다. 방 데우고 밥 짓고 물 데워서 세수하고 빨래도 하는 소중한 것입니다. 연탄은 자살 도구가 아니라 따뜻함과 희망의 상징이 되어야 합니다. 연탄처럼 뜨겁게 사랑하며 살아야지 목숨을 스스로 끊는 잘못을 저질러서는 안됩니다.”

유난히 강추위가 기승을 부렸던 올 겨울, 유류비까지 천정부지로 오르면서 연탄에 대한 수요는 더욱 늘었다. 이 때문에 평지의 경우 한장에 500원이던 연탄 가격이 700~800원까지 뛰었다. 덩달아 연탄을 얻기 위해 연탄은행의 문을 두드리는 이웃들도 크게 늘었다.
“예년 같았으면 보통 한 가구에 150장 정도 연탄을 지급하면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이번 겨울엔 200장도 모자랐던 상황이죠. 하루에도 몇 통씩 ‘연탄을 더 달라’는 전화가 왔었지만, 모두 보내드릴 수 없었던 게 아쉽기만 했습니다.”

그래도 연탄은행은 편법을 쓰지 않았다. 연탄생산 공장과 직거래 하면 예산을 줄일 수 있고 물량 확보도 쉽지만, 그럴 경우 연탄을 배달하는 영세업자들이 몰락하게 되기 때문이다. 좋은 일을 한다고 해서 남에게 피해를 주게 된다면 의미가 퇴색될 수밖에 없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허 목사는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연탄 가격의 인상을 막는 것을 꼽았다. 전국 25만 가구의 난방 연료로 쓰이는 연탄의 가격이 오르면, 그들에게는 생존을 위협하는 직격탄이 된다는 이유에서다. 뜻을 같이하는 활동가를 발굴하고, 빈곤층에게 어떠한 방식으로 도움을 줄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계속해 나갈 작정이다.

내달 13일에는 강원도 원주 연탄은행 1호점이 있던 자리에 ‘만원감동 행복센터’ 준공식이 열린다는 소식도 전했다. 센터 안에는 기존의 연탄은행부터 무료 급식소, 저소득층을 위한 할인마켓, 독거노인 지원센터, 노인들을 위한 청춘카페와 공부방 등이 들어서게 된다.

허 목사는 이를 위해 지난해 6월부터 모금 운동을 벌여 5만여명의 참여를 이끌어냈다. 그는 “돈이 많아서 부자가 아닌, 나눌 게 많아서 부자인 세상이 곧 오리라고 믿는다”며 밝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만 14세 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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